삼성엔지니어링 양학수
그날 아침, 시험장으로 향하는 나는 담담했다.
두 시간 전 쯤에 미리 도착해서 게시판에 있는 내 이름 석자를 확인하는 순간, ‘아! 또 여기에 내가 왔구나. 이번에는 어떤 결과를 가져 올까? 나 자신도 참으로 궁금하다..’
넉 달에 한번 맞이하는 휴가라서 모처럼 술도 마시고 싶고, 친구도 만나고도 싶었다. 그러나 참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 노력해야 했다. 바로 다음 날이 시험이기 때문이다.
쿠웨이트에서 날아오는 항공기 안에서 줄 곳
‘이번에는 1급을 받아야 하는데…’
‘이번에는 반드시 1급을 받아야 하는데…’
허나 세상의 무슨 일이든 어디에 공짜가 있단 말인가.
‘내가 한만큼 대가가 돌아 오리라’하고 자위하면서 트랙을 내려와 인천공항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은 온통 이 생각 뿐이었다.
‘그 놈의 영어! 이놈의 영어! 어떻게 이 올가미를 벗어 날 수 있지?’ 나는 초조해졌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 들어갔다. 현관을 열자 팔순이 넘은 어머님이 반갑다고 끌어 안는다.
안기는 듯 마는 듯 시늉만 하고나서 곧 바로 내방으로 향했다. 짐을 풀기도 전에 책장에 눈이 갔다. 이 영어의 장벽을 극복하고자 많은 책들이 열병하듯 꽂혀 있다. Five Love Languages, Excel yourself, The Woman who stole My Life, The Family You’ve Wanted 등등.
그 뿐인가, 학회때마다 받아 온 수 많은 논문들. 그 책들 옆으로 작은 책꽂이에 쌓여있는 작은 메모 노트 네 권이 눈에 들어 온다.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한 손으로 집어 들고 엄지 손가락으로 쭈~욱 넘겨 보았다. 깨알 같은 메모가 아직도 살아서 귓전에 울리는 듯 했다. 모두가 영어 문장들이었다. ‘You have to succeed in that.’ ‘It’s alarming.’ ‘Asking, asking will not work in this project.’ ‘You’re going to hang me because you’re not doing your part.’ 등등.
대충 줄 잡아 세어 봐도 천 문장은 훨씬 넘고 이천은 안될 거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방문 밖에서 고함소리가 들린다. “얘야! 국 다 식는다.” 어머니였다.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리신 것이다. 어김없이 소주 한 병이 떡 하니 밥상 위에 소주잔과 함께 앙상불을 이루고 있다. 시장기도 있었고 해서 군침이 넘어갈 분위기였으나, 나는 웃음을 잃었으니 어머니께서 적잖이 의아하신 눈초리로 다그치신다.
‘너,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
‘아무 일도 아니에요.’ 답하고는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었었다. ‘그 빌어먹을 놈의 영어 때문이에요.’
회한마저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조용히 책상 위의 먼지를 손으로 쓸며 의자에 앉았다.
눈을 감았다.
‘도대체 내가 그 동안 무얼 하며 지내왔나. 1994년도, 내 나이 39세에 모두 집어 치우고 영국으로 영어를 죽여 보겠다고 가질 않았었나. 고작 1년 동안 내가 한 거라고는 Grammar in Use라는 책 한 권과 Oxford English to English 사전 하나 사서 사돈 벌초하듯 들쳐보았고, 한국에서 공부하던 가락으로 영어 자격증 두 개 따 온 게 전부이었지 않은가. 참 지금도 기억하는 것이 하나있다. 영국 영어 교사인 Mr. Wolfgang이 한말이다. Think Everything in English. 그 후로 영어는 깡그리 잊고 지내는 세월이었었다. 이것 저것 하다 다 망하고 나서 2010년도에는 하릴없이 흐르는 한강을 보며 인당수로 여기고 몸을 던질 뻔 하질 않았던가. 그래도 그 때 내가 붙잡을 수 있는 한 가닥 지푸라기라고는 해도 해도 안되는, 그 지겨운 영어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시 불 사르고 지금의 직업을 잡을 수 있었다.
연봉 값은 해야 하겠기에 혀를 깨물고 2011년도에 Opic을 처음 도전하며 IM, 그 후 두번의 도전 끝에 2014년도에는 IH를 따지 않았던가. 이젠 1급인 AL을 따면 오죽이나 좋겠냐 마는… 이 노력으로는 어림없지, 그게 어떤 수준을 요구하는 건데…?, 일반 직장에서 영어 말하기로는 토론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수준인데, 내가 감히 어찌… ‘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몰래 냉장고를 열고 깡소주 한잔을 들이킨 후에야 아침이 왔다.
여느 시험 때와 같이 헤드폰이 내 귀에 씌워지고 질문이 쏟아진다.
정신없이 지껄였지만, 이게 맞는 표현인지 아닌지 내가 알 게 뭐람?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거였다. 앞에 있는 칸막이에 내가 가장 싫어하는 동료를 한 명 세워 놓았다. 그리고 질문의 상황에 맞게 마구 욕해 댔다. 그 옆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국인 친구 한 명을 세워 두고 마구 떠들어 댔다. 끝날 무렵 옆을 보니 아무도 없고, 뚱뚱한 것 말고는 흠잡을 데 없이 예쁜 감독관만 나를 물끄러미 쳐다 보고 있었다.
끝나고 나오며 나는 머리를 쥐어 뜯었다. 선택을 잘못했다. 하필이면 ‘글쓰기’를 하는 바람에… 아니 이거 가지고 세상에 질문이 다섯 개나 쏟아 지는데, 나는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직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점심때가 넘어 만난 어머니가 또 물으신다. ‘너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지?’
‘소주나 한 병 주세요. 나이 환갑에 Opic이 무슨 말입니까’ 나는 중얼거리듯 핀잔 섞어 대답했다.
‘얘가 뭐라고 하능겨, 오가피주가 어딨어? 소주밖에 없어. 지금..’ 한쪽 귀가 먹은 어머니때문에 난 돌아서서 할 수 없이 ‘퍽’ 웃고 말았다.
그리고, 지난 12월 4일! 내 눈을 의심하고, 수전증이 아닐까하며 내 손을 의심하고..
보고 또 봐도, 그건 분명 나의 수험번호였으며, 그 옆의 알파벳은 “AL”이었다. 1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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